
모스크바는 러시아 경제의 중심지이자 유라시아 경제 연합(EAEU) 시장으로 진출하는 관문이다. 매년 크로커스 엑스포와 익스포센터를 비롯한 주요 전시장에서는 수십 개의 국제 B2B 무역 박람회가 열린다. 식품, 화학, 섬유, HVAC, 의료 미용, 승강기 등 산업 분야도 다양하다. 이들 박람회에서 한국, 중국, 터키, 인도 기업들이 러시아 바이어와 만날 때 반드시 필요한 존재가 있다. 바로 부스 통역사다.
단순한 통역이 아닌 ‘비즈니스 파트너’
모스크바 무역 박람회에서 활동하는 통역사는 일반적인 회의 통역과는 역할이 다르다. 대부분 전시 기간 내내(보통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기업 부스에 상주하며, 방문객 응대부터 제품 설명, 기술 사양 전달, 리드(잠재 고객) 정보 수집까지 담당한다. 러시아 측 바이어가 부스를 찾아오면 통역사는 단순히 언어를 전환하는 것을 넘어, 상담이 실제 비즈니스 기회로 이어질 수 있도록 대화의 흐름을 조율한다.
특히 중요한 것은 상업적 판단력이다. 박람회에는 진지한 구매 담당자와 단순한 호기심으로 방문한 사람이 섞여 있다. 숙련된 통역사는 방문객의 질문 수준과 관심사를 빠르게 파악해, 담당자에게 “지금 이 사람은 실질적인 바이어입니다”라고 판단해줄 수 있어야 한다. 인도 쌀 수출업체가 국제 식품 박람회 채용 공고에서 밝힌 요구사항이 이를 잘 보여준다. “단순한 번역을 넘어 러시아 바이어와의 비즈니스 협상을 수행할 수 있는 인재”를 찾는다는 것이다.
산업별 전문 용어가 관건
모스크바 박람회 통역의 가장 큰 도전 중 하나는 산업 특화 용어다. 일반 비즈니스 러시아어만으로는 부족하다. 박람회마다 고유의 기술 언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섬유 박람회에서는 러시아와 터키에서 같은 원단을 다르게 부르는 경우가 많다. 한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아시아·아프리카 연구소 소속 통역사는 인터뷰에서 “러시아에서 ‘쿨리르카’라고 부르는 원단이 터키에서는 ‘쉬프렘’으로 불린다”며 “이런 경우 원단의 재질을 설명해 상대방이 이해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해결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업계 슬랭은 교과서나 웹사이트에서 찾을 수 없고, 현장에서만 배울 수 있다”고 강조했다.
HVAC 및 승강기 박람회에서는 공조기(AHU), 팬코일유닛(FCU), VRF 시스템 같은 약어와 기술 사양이 대화의 중심이 된다. 러시아는 GOST R과 SP(건축 규정)라는 독자적 표준을 운영하기 때문에, 통역사가 표준화 격차를 메우지 못하면 프로젝트 자체가 무산될 수 있다.
의료 미용 박람회에서는 피부 재생, 안티에이징, 주름 개선 같은 전문 용어를 정확히 전달해야 한다. 한국 의료 미용 기업이 모스크바 국제 미용 박람회에서 통역사를 모집할 때 “의료 미용 및 스킨케어 용어를 명확히 이해하고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을 필수 조건으로 내건 이유다.
언어 조합과 수요
모스크바 박람회에서 러시아어-영어 조합이 가장 기본적이다. 영어가 국제 비즈니스의 공용어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특정 언어 조합에 대한 수요가 뚜렷하게 증가하고 있다.
러시아어-중국어 통역 수요는 중국 기업들의 러시아 진출이 늘면서 급증했다. 기후 박람회, 승강기 박람회 같은 산업 박람회에서 중국 제조사들의 참가가 두드러진다. 러시아어-터키어 조합도 중요하다. 터키는 섬유, 농산물, 건설 자재 분야에서 러시아와 활발히 거래하고 있다. 터키 상공회의소가 지원한 모스크바 섬유 B2B 미팅에서는 터키어-러시아어 통역사들이 기업별로 배정되어 협상을 지원했다. 러시아어-한국어 통역은 상대적으로 수요가 적지만, 한국 기업이 러시아 시장에 진출할 때 없어서는 안 될 핵심 자원이다.
학생 통역사와 전문 통역사
모스크바 박람회 현장에는 두 부류의 통역사가 활동한다. 학생 자원봉사자와 전문 프리랜서 통역사다.
모스크바 국립대학교를 비롯한 주요 대학의 언어 전공 학생들은 자원봉사 또는 실습 형태로 박람회 통역에 참여한다. 2025년 모스크바 국제무역센터에서 열린 ‘국제무역의 날’ 포럼에서도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외국어 및 지역학부 학생들이 자원봉사 통역사로 활동했고, 주최 측으로부터 공식 감사장을 받았다. 모스크바 국립 언어대학교 통번역학부 학생들도 전시 통역 경험을 쌓고 있다.
전문 통역사들은 주로 시간당 또는 일당으로 계약한다. 일반 전시 통역의 경우 시간당 약 20~35유로, 일당 120~280유로가 모스크바 시장의 기준선이다. HVAC나 승강기 같은 기술 분야 전문 통역사는 더 높은 요율을 받는다.
성공적인 통역사를 활용하는 방법
통역사의 효과를 극대화하려면 사전 준비가 필수다. 모스크바 통역사 매칭 플랫폼들은 기업에게 다음을 권장한다.
첫째, 제품 목록과 기술 사양서를 사전에 제공하라. 통역사가 미리 용어를 숙지할 시간을 줘야 한다.
둘째, 예상 질문 리스트를 공유하라. 러시아 바이어들이 자주 묻는 질문 유형을 알면 통역사가 더 자신 있게 대응할 수 있다.
셋째, 리드 수집 기준을 명확히 하라. 어떤 정보를 방문객으로부터 받아야 하는지, 어떤 기준으로 잠재 고객을 분류할지 통역사에게 알려줘야 한다.
넷째, 문화적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존중하라. 러시아 비즈니스 문화는 거래 전에 개인적 신뢰를 쌓는 것을 중시한다. 통역사가 “지금 가격을 먼저 꺼내면 관계가 틀어질 수 있다”고 조언할 때 이를 경청할 필요가 있다.
결론
모스크바 무역 박람회에서 통역사는 단순한 비용 항목이 아니다. 러시아 시장 진출 전략의 핵심 요소다. 언어 장벽을 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기술적 정확성과 상업적 기회를 동시에 확보할 수 있게 해주는 파트너인 셈이다. 박람회가 끝난 뒤 기업 담당자의 기억에 남는 것은 성사된 계약과 만든 인맥이겠지만, 그 뒤에는 조용히 대화의 다리를 놓은 통역사의 전문성이 자리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