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스크바는 지하철역 하나하나가 지하 궁전이라 불릴 만큼 화려하지만, 진짜 이 도시의 속살은 걸어야만 보인다. 크렘린의 붉은 벽돌 담장 아래로 펼쳐지는 강변, 19세기 상인의 저택이 늘어선 조용한 골목, 소비에트 시대의 거대한 건축물과 현대의 유리 마천루가 한 화면에 겹쳐지는 순간들. 도보 여행은 그 겹겹의 시간을 몸으로 통과하는 일이다.
무료 도보 투어, 부담 없이 도시의 이야기를 듣다
모스크바에는 현지 역사가와 도시 전문가들이 자원봉사로 이끄는 무료 도보 투어가 활발하다. 대표적으로 ‘Гуляем по Москве(모스크바를 걷다)’ 프로젝트는 자모스크보레치예의 상인 비밀부터 미야스니츠카야의 골목 풍경, 주거 지역의 모더니즘 건축까지 다양한 주제로 1.5~2시간 코스를 운영한다. 예약은 공식 웹사이트에서 2~3일 전에 하는 것이 안전하다. 인기 코스는 금방 마감되기 때문이다. 가이드에게 팁을 남기는 것이 관례이지만, 참가 자체는 무료다.
자모스크보레치예: 19세기 상인의 모스크바로
모스크바 강 남쪽, 자모스크보레치예는 ‘도시 속의 도시’라 불린다. 트베르스카야나 아르바트와는 완전히 다른 결을 가진 동네다. 톨스토이와 체호프의 시대, 상인들이 살던 저택과 교회가 골목마다 남아 있다. 표트니츠카야 거리를 따라 걷다 보면 푸른빛 타일로 장식된 ‘셰흐텔의 에메랄드’라 불리는 갈페린 저택,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코로프코바 저택의 라일락빛 외벽과 그리핀 조각을 만날 수 있다. 자모스크보레치예를 제대로 느끼려면 유료 투어도 고려할 만하다. 마르포-마리인스키 수녀원을 포함한 2시간 30분 코스가 약 660루블(할인가 기준)에 운영된다. 슈세프가 설계한 성당과 네스테로프의 벽화는 이 동네의 정수로 꼽힌다.
강변과 공원, 도시의 호흡을 따라
콤소몰스카야 역에서 시작해 붉은 광장과 자랴드예 공원으로 이어지는 코스는 모스크바의 ‘얼굴’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콤소몰스카야 역 자체가 황금 샹들리에와 대리석 아치로 꾸며진 궁전 같은 공간이니, 지하에서부터 여정이 시작되는 셈이다. 지상으로 올라와 성 바실리 대성당의 양파 돔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크렘린 옆 현대식 강변 공원 자랴드예의 부유 다리 위에서 해질녘을 맞는 것이 이 코스의 하이라이트다. 해 질 무렵 30~45분 전에 도착해 다리 위 자리를 잡으면, 모스크바 강이 금빛으로 물들다가 푸른 저녁으로 넘어가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좀 더 조용한 호흡을 원한다면 크렘린 담장에서 시작해 파트리아르시 다리, 프레치스텐스카야 강변을 거쳐 ‘사도비예 쿼터’ 주거 단지에서 마무리하는 약 4km 코스가 있다. 차가 없는 자갈길과 잔디밭, 아이들 웃음소리와 카페 커피 향이 어우러진 이곳은 모스크바가 웅장함만으로 이루어진 도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평일 오전 10시쯤 시작하면 파트리아르시 다리에서 관광객 물결을 피할 수 있다.
문학과 건축, 테마가 있는 걷기
미하일 불가코프의 『마스터와 마가리타』를 읽었다면, 그의 흔적을 따라 걷는 코스도 있다. 불가코프 박물관은 ‘볼쇼야 피로고프스카야에서 노보데비치로’라는 코스에서 작가의 삶과 소설 탄생 배경을 들려주고, ‘마스터와 모스크바’ 코스에서는 1920~30년대 모스크바의 분위기와 소설 속 장소들을 짚어준다. ‘나쁜 아파트’에서 시작해 파트리아르시 연못의 그 벤치, 그리보예도프 레스토랑의 원형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예약은 ‘Мосбилет’ 서비스에서 가능하다.
건축 애호가라면 ‘열린 도시’ 축제나 모스크바 시 공식 프로젝트에서 운영하는 테마 투어를 주목할 만하다. 해마다 가을에 열리는 이 축제에서는 현대 건축이 도시 경험을 어떻게 바꾸는지를 주제로 한 무료 투어가 진행된다. 부르주아 거리인 불바르노예 콜초(불바르 환상로)를 따라 걷는 코스도 계절마다 다른 표정을 보여준다. 고골레프스키 불바르의 야외 체스대, 트베르스코이 불바르의 ‘브루탈 가든’, 스트라스트노이 불바르의 야외 갤러리 등이 걷는 재미를 더한다.
걷기 전 알아둘 것
모스크바의 도보 여행은 계절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겨울에는 눈과 얼음 때문에 미끄러지지 않는 신발이 필수이고, 여름에는 낮이 길어 저녁 9시가 넘어도 환하다. 무료 투어든 유료 투어든 인기 코스는 미리 예약하는 것이 좋다. 유료 투어의 경우 72시간 전까지 무료 취소가 가능한 경우가 많으니 조건을 확인하자. 지하철역 자체가 볼거리이므로, 이동할 때도 역마다 잠시 내려 둘러보는 여유를 가지면 좋다.
모스크바를 걷는다는 것은 거대한 제국사의 무게와 동네 골목의 소소함 사이를 오가는 일이다. 붉은 광장의 웅장함 뒤에 숨은 조용한 마당, 상인의 저택 벽에 남은 세월의 흔적, 강바람에 실려 오는 커피 향. 걸음이 느려질수록 도시는 더 많은 것을 보여준다.
